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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향토 문화발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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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문화원
2024-01-21 19:07 74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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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향토 문화발전에 대한 고찰 - 무형문화유산을 중심으로 -  주석봉  -


Ⅰ. 들어가면서

대부분의 각 지역 문화원은 “향토문화의 계발 및 문화진흥”을 설립목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향토(鄕土)란 지역사회가 출생지?현주소 등의 계기에 의하여 개인이나 인간집단과 특수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형성되는 사회개념으로써, 경우에 따라서 자기가 태어난 곳, 조상들이 생활한 곳, 소년시절을 보낸 곳 등의 의미로 쓰여 약간은 막연한 개념이지만, 요컨대 일정한 지역으로서 오랫동안 생활하던 곳을 말한다. 향토는 사람들이 생활공동체로서의 의식을 갖는 지역사회”이다. 이처럼 향토문화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삶의 여러 가지 질감의 형태로 나타나는 문화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향토문화는 지역주민의 지역적 삶의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지역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전통과 특성, 특수한 경험과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출발함을 의미한다. 향토문화는 유형문화, 무형문화, 정신문화로 세분할 수 있으며, 본고에서는 여수의 무형문화를 지정과 비지정 문화재로 분류하여 살펴보고, 무형문화유산을 활용하여 지역문화예술을 진흥한 사례를 소개하고자한다.

 

Ⅱ. 여수시의 무형문화재

1. 지정 무형문화재

1) 거문도 뱃노래

(1) 개설

삼산면 거문도의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노동요로서, 거문도 주민들은 대개 어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성어기(盛漁期)에는 파시(波市)로도 유명했다. 고기잡이가 주업이었기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어업요가 많았는데 「거문도 뱃노래」가 그 대표적이다. 반주악기는 북ㆍ꽹과리ㆍ장구 등이며, 선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 다른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형태로 노래한다.

(2) 채록/수집상황

「거문도 뱃노래」는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서, 어장 작업을 하면서,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흥겹게 부르는 노동요로 4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구전되어 왔다. 이것이 외부로 알려진 계기는 원로민속학자이신 임석제 서울대 교수가 1970년에 남해안 일대 민속자료 조사차 거문도에 왔다가 발견을 하였고, 이를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지춘상 교수에게 채록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약 15일간 거문도에 체류하면서 정확한 채록으로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3) 구성 및 형식

「거문도 뱃노래」는 작업에 따라 노래가 달라서 여러 종류의 뱃노래가 있다. 종류에는 배에서 쓰는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술비 소리」, 배가 떠나기 전 용왕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부르는 자진모리장단의 「고사 소리」, 노를 저어가면서 부르는 늦은 자진모리장단의 「놋 소리」, 그물을 당길 때 부르는 「월래 소리」, 고기를 퍼 올릴 때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가래 소리」, 배가 가득 차서 돌아올 때 부르는 「썰 소리」가 있다.

(4) 생활 민속적 관련사항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는 지금도 음력 4월 15일 용왕제를 지내는데, 이때 「거문도 뱃노래」를 부른다.

(5) 현황

거문도뱃노래보존회는 회장 이귀순, 총무 정용현, 보유자 정경용(2009년 12월 지정)을 포함하여 총 3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2010년 6월에 지정된 전수 장학생은 배완송(1953~ ), 이강배(1962~ )이며, 1년에 정기시연은 어장사정에 따라 매년 6월이나 11월에 1회를 하고 있다. 전수활동은 매월 2~4번씩 거문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특강을 하고 있으며, 거문중학교는 체험교육으로 전수관에서 년 1~3회를 실시하고 있다. 초청공연으로는 매년 여수 거북선축제와 음력 4월 15일 거문도 풍어제, 7월에 은빛바다축제에서 시연을 하며, 타 시ㆍ도 초청 2회와 방송국의 요청으로 취재공연을 하고 있다. 1999년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아 삼산면 서도리에 47평의 전수관을 마련하였고, 2010년에는 4.7톤의 공연전용선도 마련하였다.

(6) 의의와 가치

「거문도 뱃노래」는 1976년 10월에 남도문화제에 출현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01년 3월 12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하였다.「거문도 뱃노래」는 고기잡이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어업 노동요의 하나이다. 소리꾼들의 일체감과 생동감을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는 전수관이 있어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개최되는 각종 축제 때마다 시연을 하고 있다.

 

2) 현천소동패놀이

(1) 개설

소라면 현천마을에서 소동패들이 협동하여 노동하는 모습을 엮은 전래 놀이로서, 소동패는 16세부터 19세까지의 소년을 말한다. 소동패는 농작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들은 조직의 규약을 철저히 지키며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풀베기·김매기 등 공동 노동을 하였다. 소동패 놀이는 일의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고달픔과 지루함을 잊기 위하여 풍물·노래·춤·놀이 등을 생활화한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2) 채록/수집상황

1979년 여수시 화정면 출신 장고 명인인 임재식이 옛날에 소라면 현천에 들계(품앗이)단체가 있었다는 소리를 민속학자인 정홍수에게 알려 주었다. 즉시 자료조사를 시작한 결과 그 당시 활동했던 대동패 어른들은 고령으로 모두 작고하였고, 70대 어르신들은 소동패 역할을 했던 분들이 생존해 계셨다. 소동패 활동은 이른 시기 중단되었지만, 마지막 소동패의 주역이던 정순원(당시 85세, 소동패 두목역활), 정양수(당시 83세), 김복개(당시 84세, 공원역활), 김용조(당시 80세, 수소고 역활) 등에 의해 1978년에 재현되었다. 1980년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종합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81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연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2년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고, 정홍수, 정순원, 정양수 등 세 사람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3) 구성 및 형식

소동패는 성인 남자들의 두레 조직인 대동패와 달리,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공동 노동조직이다. 대동패가 20세 이상 성인들이 운영하는 조직이라면 소동패는 대동패에 들지 못하는 16~19세 청소년들이 참가한다.

소동패는 전통시대 농경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는 공동체다. 논농사에는 일정 시기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여하는 과정이 포함돼 있다. 모를 심은 뒤 보름 정도의 주기로 논매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이때 노동력의 집중이 요구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퇴비용 풀을 확보해야 이듬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으므로 풀베기를 위한 노동조직도 필요했다. 이와 같은 요구에 따라 등장한 것이 바로 두레인데, 여수지역의 경우 나이별로 그것이 분화되어 대동패와 소동패로 구분돼 운영되었다.

소동패는 엄격한 규율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조직 구성도 체계적이었다. 소동패는 좌상(座上)-공원(公員)-영쪼시(앞?뒷 영쪼시 각 1명)-소구잽이(앞?뒷 소구잽이 각 1명)-매쪼시 그리고 일꾼들로 구성된다. 그 인원은 대개 15명 정도였다. 좌상은 마을 회의에서 선임된 어른이 맡고 상징적인 리더 역할을 한다. 실질적인 조직관리와 작업 감독은 공원이 총괄한다. 영쪼시는 소동패의 상징인 영기(令旗)를 행렬의 앞뒤에서 들고 다닌다. 소구잽이는 소고를 들고 다니면서 신호를 하거나 반주를 한다. 그리고 매쪼시는 소동패의 규율을 엄하게 하기 위해 매를 들고 다닌다.

소동패는 대동패가 되기 전 단계의 조직이므로 대동패에 대해 깍듯이 예를 갖춰 대했다. 소동패가 길을 가다가 대동패를 만나게 되면 예의를 갖춰 전갈을 보내고 통과 여부를 묻고 통행을 했다. 소동패가 대동패에 아뢰는 전갈은 ‘문전갈’과 ‘들전갈’이 있고, 전갈을 아뢴 후에는 노래판을 벌이고 논다. 소동패끼리는 대등한 입장에서 기세를 울리며 몸싸움을 하기도 한다.

소동패는 행진할 때에 영기를 앞세우고 소고를 치며 이동한다. 소고 장단 중에는 평평한 길을 지난 때 치는 ‘들소고(평전소고)’, 산길을 오를 때 치는 ‘산소고’, 풀베러 가서 중간 휴식을 알릴 때 치는 ‘반짐소고’ 등이 있다.

소동패가 하는 주된 작업은 풀베기와 논매기다. 풀베기는 하루에 한 집씩 돌아가며 해준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하루 두 번 풀을 베러 나간다. 논매기는 세 번(초벌?중벌?맘)에 걸쳐 한다. 초벌은 모를 심고 20여 일이 지난 6월 초순에 하고, 중벌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 하며, 맘은 6월 말경에 한다.

(4) 놀이의 구성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현천 소동패놀이는 문화제에 나가면서 마당놀이로 재구성되었다. 본래는 장면이 분절되지 않지만 공연물로 재구성하면서 인위적으로 마당을 나누었다. 공동 노동 속에서 이루어진 놀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마당은 동구마당에 모여 영수·영문을 잡고 공원의 지시에 따라 소고수가 ‘모임소고’를 울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소동들이 영문 앞에 줄을 맞춰 서서 공원으로부터 인원 점검과 그날 작업지시를 받고 길소고를 치면서 들로 나간다.

둘째 마당은 들로 나간 소동패가 두렁에 영기를 꽂고 김을 매는데, 초벌 논매기, 두벌 논매기, 세벌 논매기를 한다.

셋째 마당은 이웃 오용마을 소동패로부터 시비 전갈이 오면 두 마을 소동패가 기세를 올려 영문을 잡는다. 오용마을 소동패로부터 “녹포 은갑은 상사로 조련하고 기치창검은 일월을 희롱하고 영은 군중지영이요, 문은 장군지문이라. 이 문을 치워주시면 우리 소동 공좌승 뫼시고 돌아가겠습니다.”라는 영문 전갈을 받는다.

그러면 현천 소동패는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한량(閑良)[노래와 춤추기]으로 겨룰 것인가, 힘(力)[씨름·패싸움·달리기·허리잡기·밀치기 등]으로 겨룰 것인가를 결정하여 두 패가 서로 겨룬 뒤 패자가 승자 편에 정중하게 ‘가전 전갈’을 올린다.

넷째 마당은 전갈 의식이 끝나면 양편 소동패가 하나가 되어 풍물을 치면서 어울림굿(유산굿·소고놀이·자진유산굿·구정놀이 등)을 하는 것으로,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5) 현황

1982년 지정 당시에는 정홍수(1932~ 공원보유자), 정양수(소고보유자), 정순원(소리보유자)이었으나 정양수와 정순원은 작고하였고, 조교는 박춘식(1937~ ), 정종권(1935~ )이었다, 2011년 1월 현재 보유자는 정홍수(공원보유자), 박춘식(소고보유자)이며, 조교는 정종권, 박경란(1949~ )이고. 전수장학생 2명이 전라남도로부터 월 10만원씩 지원받고 있다. 사회단체 ?소동패보존회?로 등록되어 있으며, 회원수는 40명이며 현천마을 주민 50%, 시내권 회원이 50%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아 소라면 현천리에 대지 300평에 건평 250평 3층 건물의 전수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1년에 2번 전수관에서 비정기적으로 시연회를 하고 있다.

(6) 의의와 가치

현천 소동패 놀이는 풍물과 「상사소리(모심기 노래)」, 「어기야 소리(초벌 논매기)」, 「방아 소리(두벌 논매기)」, 「개구리 타령(세벌 논매기)」, 「등앗 소리(화합의 노래)」와 같은 민요 및 춤이 곁들여져 있다. 노동에서 오는 고통과 지루함을 신명으로 승화시킨 노동 예술로, 1980년 광주에서 열린 제11회 남도문화제에서 최고 대상, 1982년 인천에서 열린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고, 여수시에서 개최하는 각종 축제에서 시연을 하고 있다.

 

3) 동편제 흥보가

(1) 개설

문화재명은 동편제 흥보가로서, 지정번호는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9-1호이며, 지정일자는 2006년 12월 27일이고, 전승지역은 여수시 미평동으로서, 예능보유자는 김향순(여, 1955 ~ )이다. 여수에는 예로부터 명인 명창들이 많았다. 문화재관리국에서 편찬한 『전라남도국악실태조사』(1980년)를 보면, 김우남(여, 60), 김향순(여, 26), 김재황(남), 정홍수(남, 50) 등이 소개돼 있다. 지금도 김향순(여, 1955~ )과 김영옥(여, 1947~ )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여수에서 활동해온 소리꾼들은 동편제와 고흥의 김연수제를 주로 불렀다. 이 중에서 특히 동편제가 성한 편이다. 김향순과 김영옥이 모두 동편제를 잇고 있다.

동편제의 전승 지역은 전라도 동부인 남원, 구례, 순창, 순천 등지로 성립 단계에서는 감정의 절제, 엄격한 법식을 존중하는 식자(識者) 취향의 소리를 표방하였다. 그래서 무거운 소리를 내며 소리에 장식이 없고 맺는 부분에서 꼬리의 끊임이 확실하여 사설이 없는 부분에는 소리를 길게 잇지 않고 끊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명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겁고 진중한 발성을 하는 것을 장기의 하나로 삼았다고 한다.

(2) 내용

김향순의 흥보가는 동편제 송만갑제에 속한다. 전 보유자였던 박정례(예명: 香山)가 이어온 송만갑-김정문-박녹주 계열의 흥보가를 부르고 있다. 동편제 흥보가는 1996년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박정례가 작고한 이후 김향순이 물려받아 전승하고 있다. 이전 예능보유자였던 박정례는 구례 출신의 판소리 명창이다. 조부 박만조는 송만갑과 교유관계에 있었고, 부친 박봉래는 송만갑의 수제자로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그리고 숙부 박봉술 역시 이름을 날리던 판소리의 명창이다. 박정례 판소리의 특징은 우조?평조?계면조를 조화롭게 사용하며, 장단이나 붙임새 등이 확실한 편으로 동편제의 맛을 잘 살리고 있으며, 음악의 짜임새나 사설의 짜임새에서는 박녹주 선생과 거의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남 영광 출신인 김향순 명창은 백남희(심청가), 공대일(수궁가), 박춘성(심청가 보성제), 김재경(춘향가 동초제) 문하에서 춘향가와 수궁가, 심청가를 배웠으며, 박정례에게서 동편제 흥보가를 익혔다. 그리고 임동선 명인에게서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을 전수받았다.

김향순 명창은 지난 1975년 한국방송공사 민요 백일장 장원을 시작으로 남도명창대회 최우수상, 1987년 한라문화제 특장부 대통령상을 받았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 최고상인 대통령상 3회, 장관상 7회 수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김향순은 스승인 박정례의 소리를 제대로 승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박정례 판소리에서 보이는 우조와 계면의 조화, 소리끝을 달고 가지 않고 끊는 부분은 스승의 소리와 흡사하다. 또한 박정례는 일반적인 동편제 소리보다 계면을 더 많이 섞어 소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김향순도 그 영향 때문에 애절한 계면조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김향순은 박정례에게서 판소리 이외에 가야금 병창을 익혔다. 박정례는 열다섯에 하동권번에서 강백천 선생을 통해 판소리와 병창을 배웠다고 한다. 그 소리가 김향순에게 이어졌다. 박정례에게 배운 가야금 병창은 적벽가 중의 ‘군사설움타령’과 수궁가 중의 ‘여봐라 주부야’ 대목이다. 이것은 요즘의 병창과 달리 소리중심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근래 연주되는 가야금 병창은 소리가 중심이 아니라 가야금이 주이기 때문에 소리맛이 죽는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김향순이 배운 소리 중심의 가야금 병창은, 가야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소리가 갈 데까지 가주기 때문에, 듣기에 부담이 없고 음색도 무난하다고 말한다.

(3) 현황

2011년 현재 조교는 없고 5년 과정의 1기생은 이시원, 신영숙이 이수했고, 2기생 김영화, 박은영, 김지혜도 이수 했으며, 전라남도가 지정한 2009년 7월 1일자로 지정한 3기생이면서 전수장학생은 신지현, 송보라가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남도로부터 월 10만원씩 지원받고 있다. 전수 장학생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약 80명이 소리공부를 하였다.

(4) 의의와 가치

김향순은 어린 나이에 판소리에 입문해서 경력이 45년 이상 된 소리꾼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데도 긴 기간 소리를 해온 덕에, 공력이 깃든 목구성이 돋보이는 소리꾼이다. 그리고 전수활동을 활발하게 해왔는데, 그동안 배출한 제자들이 약 80명 이상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공연과 완창발표회 등을 통해 공연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또한 국악협회 여수지회장 활동과 국악경연대회 심사, 민속예술 지도 등도 하고 있다.

 

2. 비지정 무형문화재

1) 여수 영당(影堂) 풍어제 및 풍어굿

(1) 개설

남산동 어항단지 영당에서 정월 보름에 풍어를 빌면서 시행하는 굿으로서, 남산동 어항단지에 있는 영당은, 이 고장 어민들이 바다에서 재난을 막고 풍어를 기원하던 해신당으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풍어굿이 이틀에 걸쳐 열두거리로 열렸다. 무녀들이 영당에 있는 용왕신과 바다에 빠진 귀신을 맞아들여 가설로 설치한 굿당에 안치하고, 부정 없는 마을의 아낙들과 함께 12고리를 맺고, 동서남북 중앙을 가리키는 다섯 가닥의 길 다란 고를 풀면서 굿을 한다. 이때, 어느 한 고가 풀리지 않으면 용왕신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믿고 그 방향으로는 출어를 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고풀이에 참여한 부녀자들은 정월 한 달간 해산한 가정이나 초상집에 가지 않은 것은 물론 부정 탄다 해서 궂은 음식도 삼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로 나가려면, 특별하게 격식을 갖춘 제례는 아니지만 이 영당에 고사미(告祀米) 2말씩을 바치고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비손 정도의 치성을 드렸다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풍랑을 만나거나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한다.

(2) 채록/수집상황

대한여수연합노인회와 여수향교 정기노 전교의 영당복원 필요성과 함께 유교식 제례의 고증과, 옛날 풍어굿에 참여한 조무(助巫 : 작은 무당)들 3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1976년 여수 신청(神廳)의 마지막 대방이었던, 방종선 대방의 고증으로 기초조사를 하고 영당학술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일본관헌이 풍어굿을 중단시키고 재현된 기간이 무려 35년이 지난 관계로 주무(主巫 : 왕무당)가 작고한 상태에서, 조무들의 증언에 의해서 1978년 재현을 하였다. 초기 풍어굿 재현에 참여한 세습무는 김맹례(여), 김공례(여), 박경태(여. 김순태의 처), 김순태, 박웅기, 하기남이었다.

(3) 연원 및 변천

1943년 일제강점기에 영당이 철폐되자 풍어굿 마저 중단됐다. 1976년 여수어항단지를 조성하면서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영당을 복원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78년 뜻있는 여수지역 인사들이 민속문화보존회를 결성했다.

이후 영당 옛 터에서 1978년 풍어제와 풍어굿 열두거리 재현을 계기로, 1982년에는 당우를 복원했고, 2010년 화장실을 신축했다. 매년 5월이면 열리는 진남제 때 영당 풍어굿을 함께 선보인다. 현재의 영당 풍어굿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신으로 모신 해신당인 영당에서, (사)향토민속보존회가 지역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별신굿 형태로 이루어진다.

(4) 신당/신체의 형태

여수 영당은 남산동 어항단지에 있다. 맞배지붕의 현대식 당집이다. 애초에는 남산동 산록에 있었는데, 임란 후에 바닷가로 옮겼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국동 어항단지 조성 사업으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했다. 임란 전까지는 용왕신과 산신 그리고 최영 장군의 영정만 모셨는데, 그 후에 이순신, 이대원, 정운 등 세 장군의 영정을 더 모시고 있다.

(5) 절차

영당 풍어굿은 영당 풍어제를 시작으로 부정굿 → 제석굿 → 당산굿 → 용왕굿 → 혼맞이굿 → 고풀이굿 → 슬비소리 → 액막이굿 → 길닦이굿 → 뒷풀이굿(갯불 띄우기) 등으로 진행된다. 풍물과 노래, 춤과 놀이가 복합되어 진행된다. 죽은 사람과 산사람의 ‘살’을 푸는 의식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가는 태평소, 꽹과리, 징, 장고, 북 등의 반주에 의하며, 굿에 따라 진양, 중모리, 자진모리, 살풀이, 흘림 등의 장단에 맞춰 불려진다. 민요는 풍물 반주에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6) 현황

일본관헌에 의해 폐당 되기 전에는 고흥 출신의 무부(巫夫)인 김대인이 악공청의 악사이면서 영당의 관리인이었으나, 폐당 후 순천으로 갔으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2011년 현재 여수에는 강신무(降神巫)가 180명이 있고, 최근에 마지막 3명의 세습무(世襲巫)가 모두 작고하여 이제는 대통령상을 받을 때 주무(主巫)였던, 순천의 세습무 고인(남자무당) 김순태와 그 부인 박경자(80세)와 그의 딸 강신무 김명이(46세)를 불러서 풍어굿을 올리고 있다. 여수 영당 풍어굿은 예술적으로 입증은 되어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나, 1943년 당시 주무(主巫)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과 증언이 없고, 또 세습무의 계보가 끊어져서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고 있다.

(7) 의의와 가치

영당 풍어굿은 극적 연출을 바탕으로 종교성와 오락성을 띤 놀이굿 형태이다. 1991년 열린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라남도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 수륙고혼천도대재(水陸孤魂天道大齋)

(1) 개설

중흥동 흥국사에서 수륙의 일체 고혼을 천도하는 공양의례로서, 수륙재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무하기 위해 생성된 불교의례이다. 여기에는 내생(來生)을 받지 못하고 떠도는 수많은 원혼을 집단적으로 해원시키며, 동시에 신도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신승의 계시에 따라 유주무주(有住無住,: 떠도는 넋)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짓고 재를 설(設)한 것이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때는 국중수륙대재(國中水陸大齋)를 실행하였고, 조선의 태조도 진관사(津寬寺)와 석왕사에서 시행하였다. 수륙재는 조선조 중엽까지 국가의례로서 전승하던 중 유생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오늘날에는 민중적인 의례로 전환되어, 사찰 마당이나 강 또는 바다에서 시행되고 있다. 수륙재의 수륙은 여러 신선이 흐르는 물에서 음식을 취하고, 귀신이 깨끗한 땅에서 음식을 취한다는 뜻에서 따온 말이므로, 청정한 사찰 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행하여도 무방하다.

(2) 연원 및 변천

1599년 임진왜란 이후 민심수습을 위해 국가 위령제로서 수륙재를 개설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승 수군 300여명이 참전하게 되었고, 종전 후 전후의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선조대왕이 600여석의 쌀을 공양하여 자운스님과 300여 대중, 그리고 통제영 모든 군민이 합동으로 천도재를 지내게 된 것이 연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해군 노량에서 청혼을 하여 전라좌수영 영내에서 지내다가, 흥국사가 중창되면서 흥국사에서 300여 년간 지내게 되었다. 1895년 전라좌수영 폐영와 함께 승군도 해체되면서 수륙재가 쇠퇴하다가, 일제강점기때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으며, 광복 이후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현재는 매년 거북선축제의 행사 일환으로 개최되고 있다.

(3) 신당/신체의 형태

흥국사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석가니불인 화신이며, 수륙대재의 주불은 보신인 노사나 부처님이다. 이는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강조되던 것과 무관치 않다. 부처의 삼신 가운데 보신은 중생을 위하는 공덕의 몸이라는 뜻이므로, 그 당시 백성을 위하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4) 절차

수륙재는 부처님의 위신공덕으로 약도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진다는 뜻이므로, 먼저 바다와 육지에서 돌아가신 고혼을 바닷가에 나가 청혼하는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음에 불보살을 모시는 시련의식과 부처님께 공양하는 불공, 모든 중생을 위하는 설법, 그리고 영혼들에게 베푸는 시식, 중생에게 베푸는 회향, 마지막 위패를 태워 영혼을 보내는 소전의식으로 진행한다.

(5) 축문

불공의식 때 모든 영가가 천도되기를 기원하는 축원문 및 발원문이다.

(6) 부대행사

재가 끝날 무렵에 산사람과 영혼 그리고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화합하는 행사인 회향이 있다. 이때 회심곡, 북춤 등 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7) 현황

400여 년간 시행했던 유물들이 현재 대다수 남아 있으며(흥국사 괘불탱화, 수륙재 경판, 수륙재의 문 등), 현재에도 매년 수륙재를 매년 5월 초 거북선축제의 일환으로 여수사암연합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3) 여수 삼동매구

(1) 개설

주삼동에서 전래되었던 민속놀이로서, 땅 밑에 있는 나쁜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묻고 밟는다는 뜻으로, 보통 섣달 그믐날 밤에 하는 풍물놀이를 “매굿”이라 한다. 요즈음 현대적인 용어로 “지신밟기”, “마당밟기”라고도 하며,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풍물을 일컫거나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여수지방에서는 이를 “매구”라고 하며 풍물놀이를 “매구친다”라고 한다. 매구는 공동의 고민과 문제를 공동의 힘과 지혜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하였던 행위의 수단이다. 한편, 1963년 이전까지는 “호남우도굿”, “호남좌도굿“이라는 구별이 없었고, 그때는 ”정읍농악“, ”남원농악“이라고 부르다가 민속학자들이 풍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분들에게 ”당신은 우도요?“ ”좌도요?“ 하고 묻기 시작하자, 아무래도 자기들 가락이 우도지역에서 더 많이 왔다고 생각하여 ”우도!“라고 대답을 하면서 분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도 ? 좌도의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 차이라는 것이 비유를 하자면 말씨의 차이와 비슷한 것이지, 요즈음처럼 골격부터 생판 다른 것은 아니며 굳이 분류하면 삼동매구는 좌도풍물이다.

(2) 채록/수집상황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09전통예술복원 및 재현’ 지원사업 공모를 보고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 지역사문화위원회 주석봉 위원장이 소속분과위원들과 협의를 하여, 사라질 위기에 있는 삼동매구를 재현하기로 하고 공모한 결과, 지원사업자로 선정되어 자료조사를 마치고 풍물팀을 상쇠 손웅과 함께 꾸리고, 손양래옹의 지도와 함께 3개월간 맹연습을 하여, 재현을 하고 DVD와 재현보고서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하였다.

(3) 연원

마을굿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의 무병 ? 안녕과 풍년 ? 풍어를 빌기 위한 의례행위였다. 삼동마을에서는 “당산제” 또는 “동제” 라고 부른다. 주삼동 삼동마을은 경상도 하동으로 가는 삼일포구와 순천으로 가는 여수반도의 중요한 길목이며, 각종 물산의 이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서, 풍물굿이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구정촌”, “폰남쟁이”, “건네몰” 3개 마을이 정월보름, 칠월칠석, 한가위 때 경쟁적으로 풍물굿을 즐겼다고 한다.

삼동마을 형성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 때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 최초 입향조는 밀양손씨 손연(孫淵)으로 경상도 진주에서 이주해 왔다. 그의 5대손 계성(繼聖) 이래로 100여 호까지 번창할 때도 있었으며, 13대 후손 손양래(孫良來)가 2009년 10월까지 거주하다가 화장동으로 이주하였다. 삼동마을은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공사로 2010년 마을공동체가 해체되었다.

삼동마을 상쇠 계보는 1800년대 이전은 알 수가 없다. 상쇠를 하던 허ㅇㅇ씨의 뒤를 이어 1835년에 경주정씨가 입향 했다. 그 후손인 정순조(남, 작고, 116세 추정)가 그의 뒤를 이어 받고, 손토방(남, 작고, 121~131세 추정)과 김소돌(남, 작고)로 전수되었다. 손봉원의(남, 작고, 105)의 아들인 손양래(남, 85세)는 여수 신월동에서 태어나 17세때 삼동마을로 이주해 온 이연수(남, 작고, 86세)와 함께 그 뒤를 이었는데, 약 16년간 단절 되었다가 지금은 손양래의 아들인 손웅(孫雄, 남, 48세)이 상쇠로 활동하고 있다.

(4) 놀이방법(열두마당)

1) 당산굿

당산은 주산과는 다르다. 주산이 자연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면, 당산은 비로써 의식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당산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며,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믿어지는 신성한 곳이고 특별한 곳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을 대표하는 얼굴이며 경건한 마음으로 한마음이 돼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고,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된 축제가 형성된 곳이다.

매년 정초에 마을 보리마당에 모여 굿의 시작을 알리는 어울림굿을 시작으로, “수리길굿”을 치면서 당산나무로 향한다. “앞도 당산 뒤도 당산, 당산도 삼천리”의 사설을 한 후 가락을 치고, 당산제를 지내고 나서 “삼채굿”으로 내두름을 하고 “이채굿”으로 맺는다.

2) 길굿

① 수리길굿(12채 길굿)

보통 길을 지날 때 치는 가락으로 우도 풍물굿(우길굿, 좌길굿)과 일맥상통하는 가락으로, 전라좌도지역 순천, 광양, 보성, 고흥, 여수에서 사용되는 가락이다. 삼동마을에서는 “12채 길굿” 이라고도 하며, 여수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점차 잊혀져가는 가락이다. “수리길굿”은 발에 맞추어 가락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허튼몸짓에 가락을 연주하는 형태로 매우 여유롭고 풍요하다.

② 풍년길굿

“풍년길굿“은 넓은 길을 가거나 들판을 지날 때 또는 풍물굿을 치기 위해 입장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가락으로, 굿거리 풍의 12/8박의 리듬으로 매우 느리고 풍요로우며 멋스러운 가락이다.

3) 문굿

대문은 조선시대 민택삼요(民宅三要 : 대문, 부엌, 살림채)의 하나로서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문은 사람이나 물건이 출입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외부의 영향들로 부터 집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문굿은 안택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인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굿으로, “삼채” 가락과 “이채(휘모리)” 가락으로 이어지며, 전형적인 좌도음악의 단조롭고 힘이 넘치며, 남성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다. 가락을 맺고 난 후 상쇠가 “매구여~”하고 부르면 치배들이 “어~이” 하고 대답하고 이어, 상쇠가 “문여소 쥔 쥔 문여소”하면 사설에 맞춰 가락을 연주한 후 상쇠의 신호에 따라 “응마깽깽” 가락으로 넘겨서 휘모리 가락으로 맺는다.

4) 입장굿

주인이 문을 열어주면 영기와 농기를 앞세워 모든 치배들이 순서대로 입장을 하는데, 이때는 징의 선소리로 모든 치배들이 7분박의 가락을 치며 입장한 후 우물 앞에 모여 상쇠의 신호에 따라 빠른 입장굿으로 연결한다.

5) 샘굿

샘은 마을 생명의 근원적인 장소가 되며, 샘을 통하여 사람들은 비로소 생기를 지닌다. 당산은 범하지 못하는 금지된 장소로서 신성함이지만, 샘의 신성함은 늘 일상의 한 가운데 있다. 샘에는 정신(井神)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게 한다고 믿어 왔다. 항시 열려있는 일상의 공간으로서 샘의 신성함은 바로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번성하게 하여 마을의 생존과 번영에 항시 영향을 미친다.

제일 먼저 입장하여 찾아가는 곳이 샘으로서, 샘을 빙 둘러서서 빠른 “삼채” 가락과 “이채(휘모리)” 가락으로 맺고, 사설과 같이 가락을 친후 ”응마깽깽“ 가락으로 맺는다.

6) 조왕굿(부뚜막신)

부엌은 집안의 모든 음식이 조리되고, 난방을 하는 곳으로서 불을 다루는 곳이다. 원시 주거에서는 불이 주거공간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불은 점화력을 갖는 종교적인 상징체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조왕이란 부엌을 일컫는 말인데 엄밀히 말하면 이궁이 위에 떠놓은 정안수를 일컫는 말로, 이때는 잡귀 귀신을 몰아내고 명과 복을 비는 뜻으로, “입담해담 관제구설 삼재팔난을 물알로 제수하시고 명과 복만 쳐드리세”의 사설과 “삼채” 가락과 빠른 “이채” 가락인 “휘모리” 가락으로 맺고 절을 동남, 남서, 서북 방향으로 세 번한다.

7) 철륭굿

철륭굿은 집 뒤안에 집을 지켜주는 철륭신을 부르는 굿으로, 사설을 보면 “앞 철륭 뒤철륭 철륭철륭 울리세”와 “삼채” 가락, 빠른 “휘모리” 가락으로 맺으며 절을 세 번 울린다.

8) 노적굿

마당은 생산 공간이자 생활공간으로서, 다목적으로 쓰여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비워져 있어야 했다. 더구나 주 건물 자리가 풍수상의 혈(穴)이라면 마당은 양기를 받아들이는 곳으로서, 수목으로 마당을 채우는 것을 금하였다. 한국적인 정원이 여백의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우주를 표현하고자 각종 인공물울 빽빽이 배치하는 일본의 정원과는 대조적인 마당의 가치 때문이다. 따라서 마당은 작업장이자 곡물의 임시저장소로서, 곡물의 건조장으로 각종 행사의 장으로서 중요시 되었다. 마당밟기에는 노적마당이 이러한 마당의 중요성을 표현하는 가신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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